역동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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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동서원의 창건과 운영

  역동서원은 1570년(선조 3)에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 선생을 위시한 지방 유림의 공의로 역동 우탁(易東 禹倬, 1263~1342) 선생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되었습니다. 우탁 선생이 중국의 '역학(易學)'에 조예가 깊어 동방의 후진들에게 가르쳤으니, 퇴계 선생은 역동서원으로 이름을 짓고 서원의 모든 현판 글씨를 썼습니다.

  역동서원은 안동지역 최초의 서원이었으며, 1684년(숙종 10)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1868년(고종 5)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되었다가, 1969년에 복원되었습니다. 그 후 안동댐 건설로 인하여 서원은 1973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건되었으며, 다시 안동대학교 송천동 캠퍼스가 조성된 후 안동대학교에 기증되었습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상현사(尙賢祠), 8칸의 명교당(明敎堂),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입도문(入道門), 1칸의 광명실(光明室), 1칸의 전사청(典祀廳), 1칸의 장서각(藏書閣), 10칸의 주사(厨舍) 등이 있으며, 사우인 상현사에는 우탁 선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습니다.

  강당인 명교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강학장소로 사용되었고, 동재와 서재는 학생들의 공부방 겸 기숙사이며, 광명실은 도서실이며, 전사청은 제수(祭需)를 장만하여 보관하는 곳이며, 주사는 서원을 수호하는 관리인[庫直]이 살던 건물입니다.

  서원에서는 현재까지 매년 2월 하정(下丁 : 세번째 丁日)과 8월 하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역동 우탁의 생애

  선생은 단양(丹陽)인으로 자는 천장(天章), 탁보(卓甫), 호는 단암(丹巖), 백운당(白雲堂)입니다. 선생은 중국의 '역학'을 동방으로 옮겨왔다고 하여 '역동 선생'이라는 존칭으로 불렸습니다. 고려시대 문인으로, 1263년(원종 4)년에 태어나 1278년(충렬왕 4)에 향공진사(鄕貢進士)로 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 등을 역임하였습니다. 1290년(충렬왕 16)에는 과거시험에 급제하여 영해사록(寧海司錄)이 되었습니다. 

  선생이 감찰규정(監察糾正)을 지내고 있던 1308년 8월, 충선왕이 즉위하였습니다. 같은 해 10월, 충선왕이 부왕인 충렬왕의 후궁인 숙창원비(淑昌院妃)와 밀통하는 일이 일어나자 선생은 도끼를 들고 임금 앞에 나아가 자신의 말이 잘못되었을 때 목을 쳐도 좋다는 지부상소(持斧上疎)를 올리게 됩니다. 

  이후 낙향하여 학문에 전념하였으나, 충숙왕(재위 1313~30, 1332~1339) 연간에 진현관 직제학(進賢館 直提學), 성균관 좨주[成均館 祭酒]에 연이어 임명되어 당대 사회 전반의 한계와 부조리를 극복하고자 주자성리학 진흥에 힘썼습니다.  

  선생은 성균관 좨주에서 치사(致仕) 한 뒤 현재 안동 지역인 예안현에 퇴거하였고,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다 1342년(충혜왕 3) 2월 7일 81세로 생을 마쳤습니다.